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육군의 증원과 일본의 최후통첩 === 상하이 파견군의 주력인 9사단은 2월 9일과 10일 양일에 히로시마와 우시나를 출발, 14일부터 16일에 걸쳐 상하이에 상륙했다. 하지만 일본의 로비에도 2월 13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총영사는 상하이의 무라이 일본 총영사에게 육군의 파병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고 특히 미국의 항의가 심했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 역시 15일 "미국 정부로서는 도저히 이를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중국 측에서 이를 구실로 혹시 보복적으로 조계 내를 공격하여 미국인의 생명 재산에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라고 항의했다. 이에 주미 일본대사는 "미국도 영국도 일찍이 중국 측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나아가 불상사를 겪기도 하였다. 만약 장래 미국이 오늘날 일본이 봉착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면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육군을 조계로 상륙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일본 육군은 거의 상륙을 종료하고 있다. 이제와서 항의하는 듯한 태도를 표명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2월 16일 프랑스 조계지에서 중일 정전교섭이 행해졌으나 일본 측이 중국군의 20킬로미터 철수, 오송, 사자림 포대의 철거, 항일운동 단속, 중국군 철수 이후의 일본군 철수 등의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이날의 교섭 역시 결렬되었다. 사실 일본측은 강경한 요구를 계속 내놓음으로 실질적으로 교섭하기보다는 공격의 명분을 축적하려 하고 있었다. 2월 17일 0시, 중국군 지휘부는 오송,강만,갑북,진여,남시를 연결하는 방위선을 설정하고 일본군에 대비했다. 강만역의 남쪽은 19로군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군이, 북쪽은 5군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군이 방어했다. 총지휘는 19로군 총지휘관 장광나이가, 우익군 지휘군은 19로군 군장 차이팅카이가, 좌익군 지휘관은 5군 군장 장즈중이 맞았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방위태세를 점검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하이 주변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다. 적군은 어쩌면 정면공격을 하지 않고 우리 쪽의 배후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진지에는 작은 강이 종횡으로 흐르고 있어 수비하기 쉽다. 일본군이 만약 전면 공격으로 나온다면 그 희생은 우리의 10배 이상이고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은 2월 18일 중국측에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여기서도 외무성과 군부가 협조했다. 일찍이 요시자와 외상이 9사단 상륙 이후 "이제 9사단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19로군에게 퇴각을 요구한다. 만약 듣지 않으면 일격을 가해 이를 격퇴시켜 나간다."라고 말했고 무라이 총영사가 외상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 시장 우톄청에게, 그리고 9사단장 우에다 켄기치가 19로군 군장 차이팅카이에게 각각 통첩을 보냈다. >"중국 군대는 20일 오전 7시까지 제1선의 철수를 완료하고, 같은날 오후 5시까지 조계로부터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지역까지 완전히 철수하라. 또 철수지역의 포대 및 기타 군사시설을 철거하고 재구축을 하지 말라. 만약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 군대는 자유행동을 취한다. 중국군의 제일선 철수가 완료된 이후 일본군은 그 실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호위병을 대동한 조사단을 철수 지역으로 파견한다." 여기에 더해 무라이 총영사는 군부가 요구한 것에 조건을 더 붙였다. >"항일회의 즉시 해산 및 기타 배일운동의 금지에 대한 약속을 철저히 이행할 것, 만약 이러한 것이 실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당한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톄청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귀 총영사의 서한에서 발하고 있는 <상하이 방면의 엄중한 정세>는 모두 일본의 군대가 조약과 공법을 위반하고 멋대로 우리나라의 영토를 침입했고, 우리나라 국민을 참살함으로써 조성된 것이다. 일본의 군대는 아직도 도발, 공격, 폭격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국민의 격분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른바 항일운동이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일체의 책임은 일본이 져야 할 것이다." 중화민국 외교부도 시게미쓰 마모루 공사에게 '일본의 요구는 무리한 난제이며 일본이 계속해서 진격한다면 중국군은 저항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한편 일본측은 스팀슨 국무장관에게 일본의 최후통첩에 대해 "제국 정부는 상하이 방면에서의 전투를 방지하고자 하는 견지에서 오늘날까지 가능한한 중국군의 자발적인 철퇴를 권유하여 왔다. 글머에도 중국측에서는 우리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병력을 집결시켜 적대 행위를 계속하여 일부러 조계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따라서 제국 정부로서는 이러한 위급한 사태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24시간의 유예 기간을 두어 최후의 통첩을 발동함으로써 중국군에 대하여 조계 20킬로미터 밖으로의 철병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 국제연맹 이사회는 2월 19일 일본에게 최후통첩 기간을 연장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요시자와 외상은 2월 20일에 "최후 통첩의 기간은 이미 종료되었으며 우리 군대는 이미 행동을 개시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19로군의 태도에 일대 변화가 없는한 이러한 기한을 연장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이에 20일 아침 해군의 치욕을 씻어주겠다고 득의양양하던 상하이 파견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